두사충과 모명재
대구 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사람으로 임난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도우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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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면 고락을 같이 하고
동으로 오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하네
성남쪽 타향의 밝은 달아래
오늘 한 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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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¹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이 들어섰다.
※ 주(註)
계좌정향(癸座丁向) :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향해 좌향